'무엇을'
후토리 후유엔 → 린도 스미 / 텍관로그
다 쓴 스케치북을 꽂으려고 보니 책장에 자리가 남아있지 않았다. 입학할 때만 하더라도 중학교 시절의 교과서를 버리느라 텅 빈 책장이었는데, 어느새 책장 한 칸을 전부 차지하고도 넘쳐 여기저기 틈이 나는 곳마다 스케치북의 스프링이 튀어나와 있다. 후유엔은 정리를 포기하고 책장 앞에 주저앉아 튀어나온 스프링들을 만져보았다. 시간 순서대로 꽂혀 있지 않은 스케치북들은 펼쳐보지 않는 이상 언제 어디서 사용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중 하나를 펼치자 맑은 날 교정을 그린 그림이 나왔다. 어느 봄날, 나무가 길게 자라 그림자가 교정 창문 위로 드리워지고, 구름은 덧없이도 흘러가던 그런 날. 그림 곁에는 3월 7일 하는 날짜와 함께 '린도 선배와 함께'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앉았던 벤치의 위치를 기억했다. 그림을 보고 있자 그날의 대화도 느리게 떠올랐다. 당신은 늘 그림 곁에 무엇을 그렸는지 적었다. 나는 당신에게서 '언제'를 기록하는 방법만을 배우고 '무엇을' 그렸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페이지를 펄럭이며 넘긴다. 1학년 교실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며 그린 농구대와 축구대, 2학년 교실에서 복도를 바라보며 그린 다른 교실의 문들. 운동장 벤치에 앉아 그렸던 학교 곁의 급수대, 교실, 동아리실, 창문이 열려 있는 보건실.
자신이 가본 공간이라면 전부 한 번씩은 담겨 있는 스케치북은 하나둘 후유엔의 옆자리에 쌓여간다. 아, 이건 얼마 전에 그린 거구나. 이건 몇 달 된 스케치북이고. 이건 린도 선배에게 받은 스케치북이었던가. 시간순으로 차분히 정렬을 하다 보니 최근 그림에선 부쩍 사람의 실루엣이 늘었다.
아직 완벽하게 사람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곳에 존재했던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실루엣만을 희미하게 그려 넣은 그림들은 어쩐지 유령들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건, 제게 참 잘 어울리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사람의 표정과 감정을 담아내지 못하는 그림. 애초에 그것이 후유엔의 목표도 아니었지만, 린도가 졸업하기 이전까지 누군가를 그리는 일은 없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문득 아쉬워졌다.
다른 스케치북 하나를 꺼내기 위해 손을 뻗자 그 사이에서 후두둑, 무언가 떨어졌다.
후유엔은 바닥에 떨어진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보며 다시 정리를 멈추고 앉았다.
프랑스부터 스페인까지 쭉 다녀오는 걸로요. 노트르담과 사그라다를 보고, 그대로 돌아오는 건 어떨까요.
저는 스페인이라면, 카사 밀라가 보고 싶네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죠. 정말 스페인에 간다면, 사진. 보내드릴까요?
사진··· 네, 좋아요. 유명한 건축물이 아니어도 여러 장 찍어 주시면 좋겠어요. 종종 거리의 흔한 건물도 시선을 끌 때가 있으니까요.
네, 그럴게요. 저도 그런 걸 좋아해요. 일상의 풍경이나 흔하지만, 이곳과 다른 분위기 같은걸요.
폴라로이드 사진 안에는 일본과는 다른 양식의 가로등이 담겨 있다. 그저 평범한 도로, 거리, 좁은 강물 위를 잇는 다리. 비에 젖은 간판과 어디에나 있는 작은 가게들의 가판대. 정교한 건물들을 멀리서 찍은 사진과 사람들을 찍은 수많은 사진. 선물로 건네주었던 사진들은 후유엔에겐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그 당시에 당신의 손을 잡고 어찌나 설레했던지. 사진을 하나하나 넘겨가며 이곳은 어디고, 몇시에 찍은 사진인지를 물어보면 당신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하나하나 대답을 해주고는 했다. 그래서, 사진 뒷면에는 당신의 말들이 전부 메모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 후유엔은 그것보단 더 중요한 것을 기록했어야 했다고 느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의 얼굴과 표정, 행동, 걸어갔던 길과··· 발자국 따위의 것들을.
사진 속엔 당신의 추억이 담겨 있으나 당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종종 메모의 글씨체가 당신의 것을 제외하면 그 어디에도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당신이 졸업한 뒤에도 이 사진들을 꺼내 보면 그때를 추억할 수 있겠지만. 기억이란 본래 영원하지 않은 법이다.
후유엔은 어느 비 오던 봄날을 떠올린다. 유난히 날이 추웠던 그 날, 당신은 평소엔 잘 앓지 않던 심한 감기에 걸려 온 몸에 열이 끓었다. 택시를 한사코 거부하던 당신을 태우기 위해 좀처럼 부르지 않는 기사를 불렀던 날. 당신은 바쁘게 변화하고 따라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늘 다른 사람이 운전석에 앉아 다른 길로 움직이는 것이 싫다고. 겨우 적응하는 순간 떠나버리는 것이 싫다고.
후유엔은 이제서야 당신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이 봄이 정말로 지나고 나면 교정엔 더이상 당신이 남아 있지 않겠지. 겨우 덩어리진 그림자를 그려내는 법을 배웠는데, 그 형체가 바람이 일듯 사라지고 말겠지. 차라리 나를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렇게 자신을 흐리게 비추면서 만은 살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 쓴 스케치북을 백지로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미 번져버린 흑연이 새삼스레 손끝에 묻어나는 것을 보며 후유엔은 조심스레 사진들을 그러모았다. 책장에 기대어 앉아 비어있는 페이지 하나를 찾았고, 책상 위를 더듬어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었다.
후유엔은 빈 페이지 구석에 작은 벤치와 나무 한 그루를 그려 넣었다. 벤치 위에 사람은 없이 스케치북만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그림을 그렸다. 굴러다니는 연필들과 바닥에 떻어진 동백을 그리고, 하늘에는 덧없이 구름이 떠가는 것을 그렸다. 곁에는 늘 그렇듯 짧은 메모를 남긴다.
언제, 3월 4일.
누구와, 린도 선배님과.
무엇을, 기억을.
* 로그가 조금 우울해진 기분이 드는데 선배님이 졸업한다니 후유엔이 센치해서 그렇습니다.
린도가 여행은 다녀왔을까요? 약속은 이행했다고 하셔서 다녀왔겠거니, 하고 쓴 로그랍니다.
안다녀왔으면 어쩌지? 다녀왔다고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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