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

2021. 3. 26. 15:58

후토리 후유엔 → 이와이 카에데 / 텍관 로그

 

 



 테이블 건너편에는 검은 머리 붉은 눈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식기들과 향기로운 전채 음식들 사이에서도 시선을 잡아끄는 여자아이. 분명 사이에는 두 사람은 족히 설 법한 넓이의 테이블이 있었으나 은은한 장미 향은 코끝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예의 바른 몸짓으로 식기를 들던 아이는, 건너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치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어른들의 대화는 알 수 없는 단어들과 함께 길게 이어졌다. 형은 제 몫의 식사를 마치더니 아버지의 곁에서 대화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그런 형을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편에 앉아있는 어린아이들은 지루하고 좀이 쑤시는 자리가 싫은 모양이었다. 아직 표정을 숨기지 못할 나이 아이들의 얼굴에는 명백한 불만이 떠올라 있었다. 후유엔또한 비슷했다.

 하지만 한 사람. 당신만은 처음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좀 전에 나온 후식을 한 입 도도하게 썰어 입가로 가져가곤 냅킨으로 그 주변을 닦는 아가씨. 화려한 무늬의 다기 그릇들과 단조로운 테이블보가 놀랍도록 잘 어울리는 사람. 거친 다다미방 위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흐트러지지 않는 당신은, 잘 꾸며진 정원 안에 고고히 서 있는 단풍(楓) 같았다.

 매화, 장미, 동백···. 붉고 단아하며 아름다운 것들은 무엇이든 당신을 수식할 수 있다. 허나 당신은, 동백이라 하기엔 겨울이 어울리지 않도록 따스했다. 장미의 향은 풍겼으나 여름의 아득함과 가시가 없었고, 봄을 기다리기만 하는 매화는 늘 한 걸음 앞서는 당신의 뒤를 따를 수 없었다. 여름의 수완을 알리고 다가오는 겨울을 위해 거름을 내리는 가을. 멀리서 보아도 붉고 선명한 당신은 이파리가 떨어지지 않는 단풍이었다. 

 다시 눈이 마주치면 당신은 나의 이름을 물어온다. 작은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대답을 당신은 참 손쉽게도 들었다. 이와이 카에데. 이미 다 자란 것처럼 보이던 작은 여자아이는 얼그레이와 자몽을 좋아했다. 잔잔하고 고급스러운 재즈 음악을, 손끝에서 연주되는 샤미센의 선율을, 먹음직스럽게 요리 된 크림 새우를 좋아했다. 

 그런 그녀를, 작은 소년도 좋아했다.





 그날. 벤치에 앉아 봄바람을 맞으며 드리워진 이파리 사이로 햇볕을 올려봤던 날. 당신과 처음으로 나눈 대화는 여전히 가슴과 머리 한구석에 남아있다. 자기 자신을 먼저 보살피며, 행위의 당위성을 타인에게서 찾지 말라는 말. 스스로를 믿고 소중히 여기라는 말. 삶에 있어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고, 늘 피해서는 안 된다던 말. 당신의 상냥한 조언은 근래 들어 후유엔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목전에 다다랐기에.

 늘 그 자리에서 장미처럼 고고히, 단풍처럼 우직하게 서 있을 것만 같던 당신은 여름이 지나며 연꽃이 되었다. 탁한 물을 맑게 하고 빗물에 젖지 않는 수려한 연꽃. 사람은 누구나 변화하기에 당신의 온화함이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당신 또한, 스스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게 되었구나, 하고 후유엔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신도 변하기로 마음먹었던 어느 겨울. 어머니가 가는 길을 따르겠다고 말했던 어느 저녁. 후유엔은 드물게도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정적 이후 몇 마디 말이 오갔다. 이와이씨, 저···. 갑작스럽지만, 용기가 필요해서요. 이와이씨가 한 번만 응원해주신다면··· 좋겠어요. 한 번을 청하지 않았던 부탁에 당신은 엷은 걱정이 담긴 투로 대답했다. 그 대답이 고마워 눈물이 날 것 같았으나, 약해서는 안 되는 날이기에 속으로 삼켜내었다.

 


 

 후유엔은 아이키도를 배우지 못했다. 운동이라고는 영 재주가 없어 다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지경이었다. 

 후유엔은 봄이 지나기 전부터 꾸준히 피아노를 배웠다. 화려한 곡을 연주하는 것은 아직 일렀으나, 어려운 악보라도 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자 제법 들어줄 만한 음악이 나왔다. 조금 더딘 아베마리아를, 그리 잔잔하지 못한 밤의 꿈을 당신에게 들려주었다. 실수투성이의 백조의 호수까지 연주가 끝나고 나자 당신은 제자리에서 조용히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을 위한 연주였다.





 사람은, 계절이 흘러가듯 빠르게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겁을 먹고 움츠린 소년은 자신이 있던 자리에 서 있다. 그저 몇 걸음, 그어둔 원 바깥으로 한 걸음을 이제 내디뎠을 뿐이다. 저만치 앞서 달려간 당신의 뒤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은 아쉬웠으나, 후유엔은 이제 슬프지 않았다. 뻗어진 길은 일직선이 아니며 언젠간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젠 다 자라버린 여자아이는 여전히 얼그레이와 자몽을 좋아한다. 잔잔하고 고급스러운 재즈 음악을, 손끝에서 연주되는 샤미센의 선율을, 먹음직스럽게 요리된 크림 새우를 좋아한다. 그런 이와이를, 후유엔도 여전히 좋아했다. 

 

 

 

 

 

 

* 이와이와의 대화에서 진지하게 이어졌던 부분도, 이와이의 연꽃으로의 성장도 좋아...
어떤 로그를 쓸까 하다가 이런 로그가 나왔습니다. 날조가 조금 가미되어 있습니다.
후토리가 매사에 조금 진지한 편에, 이와이와의 관계도 특히나 그래서 롤플이 다소 무거워 질 때가 있네요.
혹 불편하시거나 부담되시거든 언제든 말씀해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카에데야... 네가 친구여서 행복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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