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曳引)

2021. 3. 25. 16:35

후토리 후유엔 → 아카이 시라유키

 

 

 봄날은 그 자체로 꿈결과 같다. 녹음 우거지는 여름의 경관은 푸르고, 가을의 붉은 길은 발아래에서 금방 거름으로 변해간다. 겨울의 눈마저도 손끝에 닿고 추위에 입김은 하얗게 부서지는데, 봄의 따스함은 손안에 채 담기지가 않는다. 자신을 잃는 이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확신을 잃는 이는 싹이 나는 것을 탓하지 않았던가.  잡을 수 없는 신기루란 늘 봄의 것이었다.

 스치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더 남아있지 않는 것. 눈에 담기는 순간 머릿속에 기억될지언정 같은 것을 두 번 찾을 수는 없는 것. 빛과 시선 아래에 개화하고, 스스로의 몸짓으로 끝내 낙화하는 것. 한 곡조의 노래 안에서 계절은 차례차례 흘러간다. 당신은 싹을 틔우듯 발끝을 세워 걷고, 철새가 둥지를 떠나듯 옷자락을 펄럭이며 날았다.

 

 시간이 지나며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허나 제 발밑에서 피는 꽃이 무엇인지, 이 여름의 그림자가 어떤 꽃을 가렸는지. 자신의 화단에서 결실을 맺은 과실은 무엇이었으며 눈 사이에서 가장 먼저 피어난 싹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흐르는 계절은 늘 곁에 있으나 고개를 숙여 바라보기 이전엔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길이 없다. 시간은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들려주지 않는 법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되 상냥하지는 않아서, 이해하고자 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한 순간이라도 눈길을 돌렸다간 변화의 흐름에 발 맞출 수 없게 되고 만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단 하나의 무대에서 유유히 변하는 계절을 발견하고도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

二月將闌三月來  一年春色夢中回 

2월이 다하고 3월이 돌아오니, 일 년 봄빛이 꿈속에 돌아오네

千金尙未買佳節  酒熟誰家花正開 

천금으로도 이 좋은 계절 살 수 없어, 술 익는 어느 집에 꽃이 활짝 피었나.

*

 

 

 

 후토리는 당신의 눈을 마주했다. 연두빛의 눈 위로 햇볕이 드리운다. 순간 반짝이는 눈동자의 색은 흰 빛인지 금빛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아찔한 현기증에 두 눈을 감고 띄워도 당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예의 자신만만한 웃음 끝에 걸린 하나의 질문이 그의 상념을 깨고 들어왔다. 그저 나에게 어땠느냐고.

 그 순간을 떠올리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흘러나오던 음악. 익숙한 얼굴과 나누던 짤막한 대화. 하나둘 연습을 시작하는 와중,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던 발. 관객석의 중앙에서 걸음을 멈춘 채 응시해야만 했던 사람. 

 당신의 춤은 기억에 강렬히 남아있기에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흘러나오던 곡조는 사이사이가 비어있지만 상상 속의 당신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꼭 헤엄을 멈추면 가라앉아 버릴 것 마냥 춤을 추면서도, 몸짓은 사뿐하여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그곳에서. 후토리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많은 잡음과 섞여가는 음악 속의 단 하나의 독백을 들었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그곳에는 당신과 나 둘 뿐이었으며, 그 낮은 단 하나를 통해 관객석과 무대가 나뉘었다. 단 한 걸음만 걸으면 올라갈 수 있는 계단 위에서 당신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장소를 보여주었다. 그 독백은 어딘지 소란스러웠으나 경박하지 않았고, 화려한 가운데 군더더기 없이 청아했다.

 하얀 화장 아래로 흐르는 얇은 땀방울. 살풋 걸어가는 걸음에 맞추어 조금씩 풀어지는 오비. 당신을 채 따라가지 못하는 작은 무대 위의 조명.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펼친 탓에 손잡이가 살짝 벌어진 부채. 나의 박수. 당신의 웃음. 입가에 얹은 손 끝. 휘어지는 눈꼬리와, 깨어지는 무대와 관객 사이의 벽.

 

 그 춤이 나에게 어떤 춤이었느냐고, 뱉어진 질문은 어렵기만 하다. 후토리는 늘 그렇듯 자신에게 당당한 이들을 동경한다.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잘 하는 지 알고, 그것에 주눅 들지 않은 채 웃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솔직히 답하고 싶었다. 어떤 대답을 들려주어야 당신이 만족할 지 알 수는 없었으나, 대답을 망설이기엔 그 춤이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당신은 그런 춤을 춘다. 입에서 나오는 것만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춤을. 그 어떤 것이라도 귀를 기울이면 눈으로 보는 것과 다른 것을 들을 수 있고, 단 한 사람의 관객이라도 있다면 초라해지지 않을 춤을. 고작 손을 뻗고 말을 거는 것 조차 잘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그저 고개를 들기만 하면 완성된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지독하게 상냥하고 아름다운 춤을.

 

 후토리는 입을 열어 짧게 대답했다. 긴 감상을 늘어놓기엔 말주변이 좋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웃었다. 당신의 춤을 떠올린 나에게서 행복을 읽을 수 있도록. 당신이 무대를 끝낸 순간처럼 밝지는 않았으나, 눈이 휘고 뺨에는 약간의 혈색이 돌았다. 후토리는 생각했다. 또 떠올렸다.

 

 

 당신은 사계의 춤을 춘다. 천 일의 날을 엮어 만들어낸 하나의 계절을.

 

 

 

 

인용: 정이오(鄭以吾)의 한시, 《次韻寄鄭伯亨(운을 빌려 정백형에게 부침)》

 

 

 

 

 

 

* 좋은 로그............................................감사합니다.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하나 더 썼습니다. 이전 로그는 티져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하지만 춤 추는 부분을 또 쓰자니 분량이 굉장히 늘어날 것 같아 그 부분은 생략했어요.
아카이야... 넌 정말.................... 미쳤어........ (좋은뜻입니다...)
포타 처음 써보는데 글자 크기를 못바꾸네요...... 오너사담이 너무 커서 죄송합니다...
후토리가 무슨 대답을 했는가, 는 로그에서도 멘션에서도 생략되어 있으니 상상해주세요... U///U
포스타입이 너무 구려서... 티스토리로 링크를 갈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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