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2021. 3. 26. 03:01

 




 꺼진 휴대폰 액정에 얼굴이 비쳐 보였다. 창문과 커튼은 닫혀있고 거실의 불은 꺼져있다. 후미코―친할머니―의 건강이 정상궤도로 돌아온 뒤 파파라치의 행패는 많이 줄었으나, 여전히 종종 느껴지는 시선에 커튼을 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유엔은 자신이 아직 성년의 나이가 아님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형처럼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몸이었다면 어디를 가든 시선을 신경 써야 했을 것이다.


 지난여름, 토리요우 내부에는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신문과 인터넷 기사가 쏟아지던 것처럼 후계자에 대한 많은 공방이 오갔고, 지분을 포기하는 주주들이 있었다. 후미코의 판단을 '이성적이며 현실적인 판단'이라고 치하하는 언론과 '여성 대표의 감정적인 결단'으로 치부하는 언론의 싸움도 있었다.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입에 '후토리'는 끈질기게도 오르내렸고, 아버지는 후자의 편이었다.

 한때 토리요우의 역대 주가 중 최하위를 달성했던 주가는 겨울이 다가오며 원상 복구됐다. 후미코는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전보다 더 도전적인 태도로 사람들 앞에 나섰다. 새로 론칭된 신제품은 불티나게 팔렸고, 새로 도입된 기술은 세간의 시선을 끌었다. 단지 그뿐. '후토리'의 일상은 이전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물밑으로만 오가던 신경전이 세상에 공개되니 가족 간의 분위기는 절로 서먹해진 것은 물론이다. 어머니의 태도는 그리 변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문제였다.

 사실 늘 그랬다. 이 집에선 늘 아버지만 문제였다.

 

 


 "···아, 아버지. 오셨어요."

 "네 형은?"

 "온다고 연락받으셨어요?"

 후유엔은 주머니 속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연락은 받은 적도 없고, 아마 집으로 온대도 형이 자신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으레 인사치레로 건넨 말이기에 아버지의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나, 그는 짧게 혀를 차더니 대답도 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구겨진 옷을 툭 툭 손으로 펴내던 후유엔은 고개를 들어 닫힌 문을 확인했다. 아직 제대로 닫히지 않은 현관문 안쪽으로는 짙은 술 냄새가 조금 났다.

 어머니와의 대립이 이어진 뒤로 아버지는 부쩍 술을 마셨다. 본래도 흡연을 하긴 했으나 그 빈도도 늘어난 듯했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거나 집 안 가구를 부수는 일은 없었지만, 밤늦게 귀가한 날이면 저렇게 방 안으로 들어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실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고, 수완이 훌륭했으며, 가업을 이어갈 자격이 있었다. 다만, 어머니의 능력이 그보다 출중했을 뿐이지.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이젠 형을 찾았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고지식한 사회의 강요에 발맞추어 줄 수 있는 사람. 비위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차남 대신 당당하고 자신을 닮은 장남을 찾았다. 후유엔은 그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화풀이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니 오히려 좋았다. 형은, 그런 후유엔을 향해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건축을 공부한다는 말엔 "그래, 그것도 돈이 되니 괜찮지."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서운함이나 외로움을 느낄 시기는 지난 지 오래다. 어릴 적부터 형과 아버지는 자신에겐 멀리 있는 존재였다. 특히나 늘 자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허리를 세운 형은 늘 비교의 대상이었기에. 그의 발치를 따라가거나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후유엔에게 형은 그런 존재였다. 어느새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단어가 되어버려선, '형'이라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마저 어려워졌다.


 후유엔은 거실 소파에 몸을 구기고 앉아 액정의 불빛을 켰다. 연락을 해보아야 하나 짧은 고민이 이어진다. 만일 집으로 온다면 텅 빈 냉장고를 조금이라도 채워 놓아야 했고, 어머니에게 형이 집에 왔으니 오늘은 들어오지 말라는 연락도 해야 했다. 전화번호부를 켜 '형'이라고 입력하니 딱 두 사람이 나왔다. 후유엔은 다른 한쪽의 이름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참고 '아키츠루'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저, 후유엔입니다···."

 

 


 결론적으로, 형은 집에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내 방안에 들어 있다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거실로 나왔다. 형이 방문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또 어딘가로 나가버렸고. 그로부터 30분쯤 뒤늦게 귀가한 어머니는 후유엔의 뺨을 한 번 토닥여주곤 곧장 안방으로 사라졌다. 현관에서는 어느새 술 냄새가 아닌 늘 나는 향수 냄새가 났다.

 노을은 이미 지고 한밤중의 달은 오늘따라 밝다. 이젠 커튼을 걷으면 거실보다 바깥의 빛이 환하게 느껴진다. 늘 느끼는 피로감에 몸이 무거웠으나, 누군가에게 털어놓기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풀어내야 할 것도, 견뎌내야 할 것도 없는 기저에 깔린 냉기. 후유엔은 거실 베란다에 서서 한참 찬 바람을 쐰 후에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 아침은 목이 칼칼하지, 싶었다.

 

 

 

'Log > Hutori Huyuen'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하지 않는 것  (0) 2021.03.26
봄, 나고야  (0) 2021.03.26
깊이에의 강요  (0) 2021.03.26
여름.  (0) 2021.03.25
예인(曳引)  (0) 2021.03.25

BELATED ARTICLE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