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핀 오프!〉 외전 - 페드거 솔렌타인

2023. 2. 21. 22:13

페드거 솔렌타인의 〈스핀오프!〉 엔딩 로그.
러닝 당시 약속했으나 끝마치지 못했던 일들, 엔딩 이후 썰 푼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수정해야 할 사항이 있거든 알려주세요.

 

 

 

BGM

 


 


 〈스핀오프!〉의 엔딩이 났다. 
 어느 작품이든 멋진 엔딩 이후엔 에필로그가 따라오는 법이다. 이 사랑받은 이야기는 에필로그에 이어 외전까지 착실하게 연재되겠지만, 어쨌든 '페드거 솔렌타인'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활자로 정리될 필요가 있다.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까닭에.



1. 


 레드 로즈 인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속해 있던 세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페드거도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원작의 정해진 흐름대로라면 그는 작품 속에서 어느 순간 분량이 줄어들고 그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게 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 채로 결말을 맞이하고, 외전에서나 잠깐 등장하거나 아예 사라질 예정이었다. 페드거는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당연하게도 자신이 죽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등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페드거 솔렌타인은 완성형의 캐릭터다. 이미 젊은 시절을 보냈고, 격동의 사회를 겪은 바 있으며 작품 내의 포지션또한 확고하다. 안타고니스트처럼 등장해 사실은 조력자이며, 어떤 때엔 스승의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 그런 캐릭터는 보통 완성형이어야만 한다. 비틀지 않은 시나리오의 정석은 그랬다.
 그래서, 그의 작은 결점이나 실수 따위는 그저 작가의 애정이나 예상치 못한 인기몰이 때문에 간간히 붙은 설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구태여 등장하지 않는다면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여겼다. 그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어떤 각성의 계기나 트라우마의 극복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새로운 트라우마를 만들어 준다면 또 몰라.
 하지만 〈스핀오프!〉의 엔딩을 겪고 나니 얼추 자신이 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종의 타임 패러독스 같은 것이다. 페드거는 레드 로즈 인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지식―#코즈믹호러라는 태그가 달린 그의 장르적 관점에서 말하자면―을 얻었다. 펜미만잡의 세계에서는 지식의 방대함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미지에 접근하게 되고, 심연을 마주하고 나면 사람은 미치고 만다. 이성과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신'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란 본래 그런 것이다. 그런 곳에서 '자신이 소설 속 인물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원작의 모든 흐름을 망치고 주인공의 이성을 갉아먹는 역할이 주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무대 뒤로 천천히 물러날 수밖에.
 페드거는 그 사실이 아쉽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감초 역할이며 주인공의 무리에 포함되지 않는 인물이다. 분량이 줄어들면 하늘에 떠올라 카고바지를 외치던 그 사람들이야 아쉬워 하겠지만…. 뭐 어떤가. 당신들은 지금 이 외전을 읽고 있을 텐데.

 그러니 어차피 정해진 대로 흘러갈 펜미만잡의 흐름은 뒷전으로 두어도 될 것이다. 그 세계의 정치와 사회에는 활자로 쓰이지 않더라도 참여할 수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실벳은 유지될 테고, 자신의 직원들과 가족들은 어딘가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야기라는 게 본래 그렇다. 글자 사이사이 문단 사이사이 여백에는 수천 가지의 삶이 살아 숨 쉰다. 그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우리가 넓은 면적으로 뛰쳐나왔을 때 피부가 아리도록 느꼈던 감각이다. 누군가의 글자로 쓰여진 생각과 행동이라도 그는 결코 죽어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없었다. 
 별개로 〈펜이 칼보다 강하다니까〉의 마무리가 어떻게 날지는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다. 작가가 그렇게 다작하니 별수 없지. 적어도 앞으로 300화는 더 연재하려나? 언뜻 듣자 하니 〈스핀오프!〉의 인기를 힘입어 주인공의 젊은 시절 페드거 솔렌타인을 만나는 과거 편이 추가될 것이란 이야기가 있던데. 믿거나 말거나. 

 …이 이야기는 이제 됐다. 독자들도 별로 궁금하지 않을 것이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니까〉 이야기 말고, 페드거가 〈스핀오프!〉의 연재 이후 어떻게 지냈는가 얘기나 해 보자.

 그가 다시 레드 로즈 인에 돌아가는 문을 열기까지는 26시간가량이 걸렸다. 돌아왔을 때가 오후 9시였고, 다음 날 오후 11시가 조금 넘긴 시각에 문을 열었다. 그는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마침 그날 업무를 모두 끝낸 참이었다. 직원들은 전부 퇴근해 건물에 남은 사람은 그뿐이었는데, 사실은 머릿속이 복잡해 일부러 밤늦게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주변에 할 일과 종이들이 쌓여 있으면 잡념이 머리를 채울 일은 적어지니까. 약간의 정돈이 필요했다. 그간 겪은 일이 꿈일까 아닐까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결론은 현실이었다. 그런 일들이 꿈일 수는 없었다. 꿈은 결국 무의식의 향연이라 자신이 경험하지 못하거나 상상하지 못할 일은 나타날 수 없다. 하지만 그곳에선 전혀 모르는 이야기와 사람들을 만났지. 즐겁다 못해 행복했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고 짧은 시간 동안 가슴 깊이 다가왔다. 그 과정이 생생하고 선명하다면 결코 꿈일 수 없겠지. 시작도 끝도 이렇게나 분명하지 않은가. 
 문은 사무실 책상 바로 옆에서 열렸다.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며 레드 로즈 인을 생각한 그 순간이었다. '그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지.' 그런 결론을 내린 직후이기도 했다. 허공에서 그려지는 문과 그 너머의 인기척, 온기 따위를 느끼며 페드거는 이마를 짚고 웃었다. 고개가 젖히고 어깨에 들어간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아, 그래. 나는 고작 하루가 되는 시간 동안 그들이 그리웠던 모양이야.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아주 당연한 일이지. 페드거는 오랜만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라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여는 순간까지가 아주 짧고 빨랐던 것 같다.


 낡은 간판 아래를 지나 삐걱이는 문을 열면 따듯한 노란 불빛, 그리고 당신을 맞이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난로에서 장작이 타닥타닥 느리게 타들어가는 소리, 바에서는 장금이 정리 중인 식기가 부드럽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2. 


 이건 그 뒤의 이야기, 혹은 줄거리, 어쩌면 삶의 기록이다.


 페드거의 '문'은 그의 집 서재 가장 안쪽에 만들어졌다. 홀로 사는 집치고는 빈방이 여럿에 거실도 다소 휑했다. 애인도 없으니 집안이 지나치게 적적하다 여긴 시간이 제법 길었다. 그런데도 이사를 가지 않은 것은 그저 이 방이 좋아서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이나 걸어가기 딱 좋은 번화가가 있으니까. 서재의 책을 모두 옮기는 것도 물론 큰일이 될 것이었고.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당신들이 찾아올 지금 이 순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빈방들은 맞이할 손님들을 위해 늘 깨끗하게 비워두게 되었다. 서재 가장 안쪽의 텅 빈 벽 위에는 이재가 선물해준 드라이 플라워가 걸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보일 창문가에는 천마와 레드 로즈 인의 사람들이 준 꽃다발의 절반이 꽂혀 있다.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여관의 창문에 기대어 놓았다. 

 한동안 서재 안쪽 책상 위가 부산스러웠다. 작은 벽돌과 톱, 가위 따위로 너저분한 책상 위에 앉아선 새벽을 꼬박 지새우기도 했다. 여러 번 마법을 쓴 왼손이 저리고 핀셋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굳었으나, 결과물은 만족스러웠다. 드물게 집에 찾아오는 마플―페드거의 비서―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이렇게 묻기도 했다. "동생분에게 조카가 생겼던가요? 정말 예쁜 인형의 집이네요." 페드거는 웃으며 대꾸했다. "네. 조카이자 하나뿐인 학생이 생겼거든요."
 분홍색과 노란색이 섞인 지붕의 인형의 집은 레드 로즈 인으로 옮겨졌다. 한 뼘의 키를 가진 요정이 생활하기에 안성맞춤인 작은 침대와 실크로 만든 커튼. 딸깍 소리를 내며 켜지는 여관을 닮은 조명까지. 타루아만의 작은 별장은 요정이 원하는 장소에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했다.

 책상에 구겨 앉아 시간을 보낸 동안에도 인연은 흘렀다. 카를에게 보냈던 편지의 답장이 돌아왔고, 그의 세상에서 아름다운 백마를 선물 받았다. 훌륭한 선생님의 지도 아래 왈츠와 검술을 배우기도 했다. 여러 밤의 위로와 휴식 이후엔 더 이상 열리지 않을 문 대신 에이던스 영지의 성으로 방문했다. 북부는 추웠으나 사람들만큼은 주인을 닮아 참 따듯했지. 선물 받은 백색의 모피와 잘 짜인 옷들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꺾이고 부서지길 거부하던 굳건한 사내와 형제를 위해선 부서지기도 마다 않던 사내. 레드 로즈 인이 아니었더라면 평행선에 섰을 두 사람이 오로라 아래 서 있었다. 페드거는 그 등을 바라보며 홀로서기를 감내하는 두 사람이 춥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손에 들린 것이 많아졌다. 이 차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이 차는 꽃향이 나고…. 번거로운 방문일 것임에도 킬리언은 묵묵히 페드거의 선물을 받아 주었다. 다음 방문에는 고풍스러운 턴테이블과 레코드판이 킬리언의 품에 덥석 안겼다. 그는 역시 곤란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기차 여행은 생각보다 늦게 떠났다. 카를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겨울 바다와 한적한 숙소, 두 사람의 발자국만 찍히는 너른 백사장은 생각만큼 아름다웠다. 그날은 눈이 내렸고, 페드거는 발목으로 차오르던 파도에 죄책감을 씻어 보냈다. 지나온 인연은 가슴에 묻어야지. 지금 존재하는 옆 사람에게 비추어보아선 안 됨을 알았다. 바람에 날리는 카를의 검은 머리카락이 시간을 견딘 만큼 길었다.

 현대와 〈펜이 칼보다 강하다니까〉의 세상을 여러 번 넘나들었다. 오른손에 그루의 손을 왼손에 레지나의 손을 잡고 쇼핑타운을 한 바퀴 도는가 하면 1950년대의 살롱에서 머리를 예쁘게 볶아주기도 했다. 여러 사람을 태우고 돌아다니기 위해 현대에서도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한 대 뽑았다. 빈티지한 외형의 고급 승용차는 이재네 주차장에 들어갔고, 차키는 물론 주차장의 주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루가 함께 골라준 심플하고 반짝이는 금색 안경 줄은 며칠 후 로한의 품에 포장되어 안겼다. 로한은 선물을 빌미로 페드거의 세계로 끌려와 한참 데이트를 즐기고 페드거의 동생까지 소개받은 뒤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는 길에 함께 해 그의 서재 속에 파묻혀 며칠간 활자로 뒤덮여 있는 동안 페드거는 꽤나 즐거웠다. 

 아경과는 서로 영어와 한자를 가르쳐주기 위한 편지를 여러 번 주고받았다. 익숙하지 않은 세로쓰기와 굵은 글자들에 처음엔 제법 씨름했다. 그가 조선이 아닌 이재네 집에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엔 마다하지 않고 뛰쳐나갔고, 이재는 이틀이 지난 뒤 이제 집에 좀 가라며 성을 내야 했다. 페드거는 웃으며 쫓겨났다. 

 테드에게는 당구를 가르쳐주었다. 만나 보고 싶던 동생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똑똑한 오빠를 둔 동생은 딱 테드를 닮아 사랑스러웠다. 폐허가 아닌 놀이공원을 함께 가고, 야경이 잘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했다. 실크와 벨벳으로 만들어진 원피스를 잔뜩 갈아입어 가며 테드의 손에 쇼핑백을 자꾸만 늘려주기도 했다. 꼬마 숙녀는 빈티지한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는 도로 위의 산책이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당구는 칼릭스토에게도 가르쳐주었다. 첫판에서 당당히 내기에 이겨선 그를 '키티'라고 부를 권리도 얻어냈고. 몇 판 하고 나니 능숙하게 큐대를 다루기 시작하는 게, 아무래도 또 내기할 일이 있거든 다른 종목을 찾아보는 편이 낫지 싶었다. 이 말을 당당히 내뱉은 페드거에게 칼릭스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비겁하다고?" 그의 말에도 페드거는 즐겁다는 듯 웃을 뿐이었다.

 영국으로 놀러 온 에어를 위해 자주 가던 양복점에 들렀다. 평소 입어보지 못한 펼쳐지는 스커트와 푸른색의 옷감으로 한참 재단사와 실랑이를 벌였는데, 결국 에어는 3벌의 옷을 선물 받고 진주 귀걸이까지 걸어본 후에야 페드거의 손을 벗어날 수 있었다. 루토의 성에 방문했을 땐 그의 옷장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한참이나 쏟았다. 가여운 루토와 그의 집사는 페드거의 패션쇼를 제법 길게 감상해야 했고, 페드거는 기어코 재단사를 빌려 옷 한 벌을 맞추고 떠나갔다.  

 미난의 세계로 찾아가 현대 아이들의 학교를 구경하는가 하면 빅터의 직장에 방문해보기도 했다. 사빈에게는 고급스러운 카드를 선물한 뒤 약속했던 포커를 가르쳐주었다. 태건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 보는 경험은 그의 안전에 썩 좋은 일이 아니었겠으나,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페드거는 바람이 시원하다며 한참을 좋아했다. 그 묵묵한 남자는 생각보다 상냥하고 타인에게 약했다. '그 녀석'보다 더 나은 남자일 텐데, 참 아쉬운 일이지. 

 천마의 세계로 방문한 시기가 페드거에겐 '인생의 가장 많은 실수를 범한 시기'였다. 신발을 벗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나, 젓가락의 사용법을 몰라 식탁에서 큰 소리를 내지 않나. 그나마 천마의 행동을 눈여겨보아 그 이상의 결례는 범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영국으로 돌아가선 '신사' 타이틀을 반납하고 은둔해야 할 지경이었다. 천마는 호탕히 웃으며 신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가 페드거를 위해 만들어 둔 비단옷은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페드거는 천마의 손에 머리를 말아 올리고 선물 받은 비단을 걸친 채 한참 목소리와 매캐한 연기를 나누고 돌아갔다. 다음 방문에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하나 생각하는 시간이 달았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 페드거는 가장 먼저 에르빈이 지낼 거처를 마련했다. 작업실은 너무 높거나 낮아 날씨를 타지 않는 곳으로, 거리와 지나치게 가까워 자동차의 경적이나 사람들의 고함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근처에는 간단히 끼니를 때울 만한 가게가 있고 언제든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자리한 곳. 신문을 파는 소년이 늘 지나다니는 골목에 가로등이 고즈넉하게 불을 밝혀 위험하지 않은 곳. 에르빈이 여행을 끝마치고 돌아왔을 땐 타자기와 책, 종이가 구비된 작업실과 그를 위한 호텔의 VIP룸이 에르빈을 반겼다. 출판사와의 미팅은 다음으로 미뤘다. 마감일에 구애받지 않고 그가 자유롭게 글을 쓰길 바랐다. 그리고 호텔과 작업실의 열쇠는 모두 에르빈에게 넘겼다. 이제 집의 주인이든 말든 페드거는 그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진 곁으로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가끔은 정말 문을 열어주지 않아 돌아가야 했다. 거듭되는 티타임이 귀찮았던 것인지, 안에 없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페드거는 바빴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글자와 문단 사이를 뛰어다녔다. 새로 사귄 인연들의 삶에 발자국을 남기고 이미 알던 인연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렇게나 바쁘고 즐겁게 살아본 게 얼마 만이더라.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지. 〈스핀오프!〉는 엔딩이 나 버렸는데 그의 즐거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아니, 사실 신기할 일은 아니다. 사람의 삶이란 죽는 순간까지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 글이니까. 벌써 에필로그에 들어가기엔 페드거 솔렌타인은 젊었다. 아직도.


 


3.


 주변 이야기도 해야겠지.

 페드거는 레드 로즈 인의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비서는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그들은 여관에서 만난 사람들이 페드거가 오지, 혹은 다른 나라에 가서 사귀어 온 친구라고 생각했다. 홀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일은 종종 있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다른 차원의 사람이라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 페드거의 세상에서 그런 말을 믿는 사람들은 위험한 사람들뿐이었다. 사람 가죽으로 만든 책을 읽었다거나, 차원 너머에서 찾아오는 각종 신들을 믿는다거나. 그런 사람들.

 동생들은 말할 수 있는 부분만을 엮어 만든 진실을 적당히 믿어주었다. 엘러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 페드거를 바라보았으나 '오빠가 이상한 사람 사귀진 않았겠지. 됐어.' 하며 넘어갔고, 파일러는 '여행에 다녀오며 사람 사귀는 건 괜찮은데, 굳이 내게 친구를 소개시켜 줄 필요는 없어….' 하며 피곤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안심한 것 같았다. 늘 일에 파묻혀 살던 솔렌타인이 제법 활기차 보였던 까닭이다. 교도소를 나온 장남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지면을 빌려 하는 편이 낫겠다.

 실벳은 여전히 잘 굴러갔다. 편집장이 이래저래 자리를 여러 번 비웠지만 돌아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른 세상에 놀러 갈 때면 이곳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기도 했고, 부러 일거리를 들고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으니까. 애초에 실벳의 모든 인원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더라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준비를 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했다.
 아, 그래. 페드거는 이번 기회에 유언장을 고쳤다. 솔렌타인의 재산이야 자연스레 동생들에게 넘어갈 테고, 실벳의 유지도 직원들의 손에 맡겨지겠지만 몇 가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 집의 처리. 서재의 모든 물건과 자택에 딸린 사무실은 다른 사람이 손대지 말고 OO호텔에 투숙 중인 '에르빈'에게 처분을 일임할 것. 그의 작업실도 의사에 따라 처분하거나 남겨둘 것. 만일 계속 사용하기를 원한다면 비용 면에서는 모든 부분을 지원할 것. 새롭게 더해진 비밀스런 생활에 대한 부분은 거즘 그렇게 처리했다. 에르빈에게 아직 동의를 구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받아주리라 믿었다. 그가 이 세계에 가장 자주, 오래 머물러주는 여관의 친구였으니 연락 닿기가 수월하지 싶었다. 
 정말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 레드 로즈 인에도 봉인된 편지를 한 통 남겼다. 그에게는 해피엔딩이 예정되어 있으니 갑작스레 실종될 일은 없다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페드거는 이런 준비와 대비가 익숙했다. 어쩌면 익숙함에 기대어 안심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고. 어쨌든, 늘 남을 사람을 생각하긴 해야 하니까.


 


4.


 페드거는 여전히 계단의 가장 앞 2층 첫 번째 방을 썼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소리, 부엌에서 들려 오는 소음과 향기로운 음식의 냄새. 짧은 순간 익숙해져 버린 노란 조명의 하모니가 들뜬 가슴을 가라앉혔다. 달라진 것은 많았다. 방 안 여기저기 걸린 다른 세계의 그림, 책상 위의 편지나 책들, 한쪽 벽에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빔 프로젝터 따위의 것들. 이 환상적인 좁은 방 안에 앉아있노라면 꼭 영화나 소설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글자로 만들어진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좀 이상할까?

 삶의 모든 순간은 희곡이니까. 주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도 결국 삶을 이어가는 것은 자신뿐인 법이다. 우연은 없이 모든 것이 운명이고, 자신이 레드 로즈 인에 온 것도 마찬가지였다. 페드거는, 여태 살아온 삶의 모든 부분을 사랑했으나 뒤섞이고 혼란한 근래의 시간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전개로 치자면 지금이 삶의 절정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소강은 그리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레지나의 커다랗고 작은 영화관에서 여관의 사람 몇과 모여서 본 영화가 있었다. 사랑의 형태에 대해 질문하는 영화였지. 그 대본 속에서 사랑의 형태를 물과 같다고 비유했었나. 만일 사랑을 담는 그릇이 그렇게나 중요한 것이라면 〈스핀오프!〉의 사랑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을까.
 찰랑거리는 잉크병? 끝이 뾰족한 만년필의 모양? 종이 위에서 움직이는 화려한 글자들의 형태를 하고 있을까? 혹은 우리가 사라지고 나타났던 그날처럼 아주 동그랗고 진한 마침표의 형태를 하고 있을까. 저마다 다른 대답을 내놓겠지만, 페드거의 사랑은 펜 속에 담겼다. 잉크병에 콕 찍어 종이 위를 휘갈기는 검고 묽은 사랑들.
 점에서 시작한 사랑은 선이 되고 면이 된다. 펜을 뗄 즘의 그림은 문의 형태를 하고 있다. 작은 간판을 걸고 그 위에 Red Rose Inn이라고 쓴다. 이 작은 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벌어졌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다. 아니,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이 이야기와 글을 사랑하고 있다면 이미 읽었을 테니까.

 아마 이 다음으로 계속 이어질 외전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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