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마음으로

2022. 4. 7. 18:07

Dear. Hebe

 

동봉한 선물은 잘 받으셨습니까? 루엔야크의 설산에서 자라는 꽃입니다. 이곳에는 식물학자나 꽃을 전문적으로 기르는 사람이 없어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습니다만, 가파른 절벽과 눈 속에서 자라는 꽃인듯합니다. 들꽃에 가까워 당신에겐 수수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다시 뵐 테지만, 섣부르게 몇 자 적습니다. 글자로 내어놓지 못한 생각들은 너무 빠르게 사라져버리더군요. 
루엔야크의 모든 말은 애셜을 말미암아 꺼내 두지 못하는 것이 맞습니다만, 당신은 곧 공식적으로 루엔야크의 일부가 될 테니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루엔야크의 지난 방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설원에서 농기구를 들고 있던 노인을 기억하십니까. 당신께선 그의 손을 잡으려 드셨고, 저는 그를 위로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이 기회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당시의 저는 그 노인만큼이나 날이 서 있던 것 같습니다.
루엔야크의 주민들은 위로받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봄이 오지 않는 겨울을 모르는 이들의 위로는 그저 기만이라 여기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제서야 외지인을 무턱대고 적대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지요. 허나 제가 어렸을 당시 그 일을 겪은 노인과 어른들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그날로 돌아가고는 합니다. 그들에게 그날의 기억은 아마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겁니다.

당신과 다른 소영주들이 함께 보았던 광경은 얼핏 절망으로 얼룩진 모습이었겠지만, 그들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헤베.
그 농민은 얼어붙은 땅을 일구기 위해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건 과거 자신이 했던 일을 떠올리고, 그 순간의 기억을 더듬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저와 어머니, 아버지는 늘 그런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에 할 수 있는 것이 다를 때 루엔야크의 사람들은 종종 그런 얼굴 합니다. 비난은 종종 루엔야크 일가를 향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이 진심이 아님을 압니다. 긴 시간 동안 그들 중 멈추는 이는 없었습니다. 이곳의 모든 이가 알고 있습니다. 원망할 대상은 루엔야크 어디에도 남지 않았음을. 

그 농민은 낫을 다루던 솜씨로 괭이를 들고 곡물 대신 광물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얼어붙은 땅에 홀로 서 과거의 영광을 되뇌지만 결국 루엔야크의 일부로 돌아옵니다. 그는 철을 다루지 못하는 자를 돕고, 섬세한 손길로 광물을 캐내고, 노련한 눈으로 그것들을 솎아냅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아직 지금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겠지요.

헤베. 저는 이리 굳건히 살아가는 이에게 동정이나 위로를 건네고 싶지 않습니다. 허울 좋은 말은 할 수도 없으나, 할 필요가 있다 하여도 삼키려 합니다. 저는 그들의 앞에서 등을 보이며 길을 걸어갈 사람이지, 곁에서 손을 잡아줄 사람이 아닙니다. 그 위치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저의 태도가 당신과 다른 소영주들에게는 영 신뢰하지 못할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루엔야크에서 살아가며 배운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를 그들은 따라주고 있습니다. 루엔야크로 돌아온 뒤 그때 마주쳤던 노인이 찾아와 당신께 무례를 대신 사과해달라 청하더군요. 후에 이곳에 방문해주실 때, 직접 받아주신다면 기쁠 겁니다. 

말이 길어졌군요.
죄송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는데, 당신에게 제 태도가 그저 몰상식하거나 뻣뻣한 모습으로만 보이지 않길 바라는 모양입니다. 어설픈 말들이래도 당신은 행간 속에서 더 많은 것들을 읽어 내겠지요. 

단지 저 이야기만을 위해 편지를 써 내린 것은 아니니 몇 자 더 적습니다. 

당신과의 결투와 약혼에 대한 이야기는 아버님, 어머님께 전해드렸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거든 귀띔해달라고 늘 말씀하시던 분들이라 제가 갑작스레 전한 소식에 적잖이 놀라신듯합니다. 아버님께서는 드물게 찻잔의 손잡이를 하나 부수기도 하셨습니다. 

또···, 당신이 온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많이 바빠지셨습니다. 지내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겠다며 침구와 커튼을 바꾸기도 하신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하루 정도는 당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생각인 듯합니다만, 저와는 달리 대화에 능통한 사람이니 큰 염려는 않겠습니다. 그저 오실 때 당신의 머리색을 닮은 꽃 몇 송이만 들고 와 주시겠습니까? 플랑이 헬레니아의 꽃을 보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해 당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이젠 저를 보아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 또한, 당신과의 만남을 기대하 고 있습니다. 
당신께 답장이 돌아오는 대로 마중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ㅋㅣ스를 담아 보냅니다.


From.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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