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To. 카와라사키 유이토 | 일상 빙고판 키워드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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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등을 따라 하얀 손가락이 움직인다. 신호가 걸리는 짧은 찰나마다 손바닥이 마주 덮이고,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차 안에 부드러운 적막이 깔린다. 자동차의 엔진음, 심야 방송을 틀어 주고 있는 라디오, 가로등의 불빛 아래로 보석처럼 흩날리는 눈송이들. 모든 순간을 눈으로 좇으며 크리스마스를 떠나보낸다. 당신과 함께 보냈던 수많은 기념일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났다. 우리는 여전히 어제와 같겠지만, 내일은 조금 다르겠지. 아주 조금.
다가가지 못했던 거리를 한 걸음 다가가고, 차마 뱉지 못하고 목 안으로 삼키던 말들을 뱉고. 수없이 생각으로만 그려보았던 당신과의 데이트를 실현하고 나면 사랑을 속삭이며 입을 맞출 수 있겠지. 지금까지의 밤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아프지 않은 가슴으로 당신의 곁에 누울 수 있겠지. 그것이 좋아 얼핏 웃으면 당신은 금방 후유엔, 하고 제 이름을 불러온다.
"후유엔, 졸리진 않아?"
"조금요. 긴장을 했더니··· 그래도 괜찮아요. 기분 좋은걸요."
"케이크까지 먹고 자는 건 무리겠네. 내일 먹을까?"
"그래야겠어요···."
"···영화 보자고 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야?"
당신의 시선이 얼핏 손가락의 반지로 닿았다. 네 번째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 한 쌍. 당신의 대답에 나는 환히 웃었다. 설렘과 긴장에 떨리는 손끝으로 그 손에 직접 반지를 끼워주었다. 남은 하나의 반지를 꺼내 나의 손에 끼워주던 순간에는 꼭 꿈인 것만 같아 깨지 않기 위해 숨을 멈춰야만 했다. 한숨이 터져 나온 뒤엔 눈물도 함께 흘리고 만다. 당신은 장난스레 웃으며 나를 달랬다. 나와 꼭 닮은 붉은 눈가를 하고.
고개를 저었다. 주머니 속의 반지 케이스를 떠올려 본다.
"반지는 늘 가지고 있었어요. 부적처럼요···. 이걸 드리는 것 이외엔 뭐든, 무섭지 않을 수 있었거든요."
자신 없는 일들, 하고 싶지 않은 일들. 관계에 지치고 당신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던 순간들. 그런 것들이 삶을 피로하게 만들 때마다 가방 안쪽의 반지를 떠올렸다. 아직 당신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던 것이라, 어떤 의미로든 다른 고민들을 무색하게 만들고는 했다.
"언제부터?"
"···형이 대학 졸업하던 때요. 아직 토리요우에 들어간다고 결정하기 전에··· 이제 졸업하면 다른 곳으로 가려나 싶어서, 따로 살게 되면··· 그땐 어떻게 되든 고백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언제부터야?"
"···좋아했던 것 말이죠?"
"응, 나는··· 음···."
당신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당신의 고민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고 있다. 사랑 고백을 들은 뒤에서야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을 알아보던 당신이다. 그전까지는 어떤 두근거림을 느꼈든 속으로 꽁꽁 묻어둔 채, 늘 그렇듯 사랑이 아니리라 생각했을 당신이다. 그러니 떠올리기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대꾸한다.
"고등학교 때부터요."
"혹시 첫눈에 반했다거나··· 그런 거야?"
"그건 아니에요. 음, 아뇨···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처음 본 순간부터 끌리기는 했으니까···."
도서관의 햇볕과 당신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그날은 맑았지. 이젠 기억 저편으로 아득하니 밀려난 순간인데도 당신의 체온은 선명히 기억에 남아있다. 붉어진 뺨을 감싸던 손길, 그 따뜻했던 손.
"통화를 하면서 점점 좋아졌어요···. 형이 그날 하루를 들려주시는 것도, 제 하루를 들어 주시는 것도. 규칙적으로 뭔갈 기다리게 된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기도 했고···. ···사랑에 빠진 순간이란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차창 안으로 도시의 불빛이 스민다. 저 멀리 가까워지는 우리의 집을 바라보다가 당신의 옆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열이 조금 오른 발그레한 뺨과 평소와 달리 잘 마주쳐주지 않는 시선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지금 나만큼이나 두근거리고 있을까. 꼭 심장이 귓가에 달린 것처럼.
"눈길을 걷고 나면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요···. 지나 보니, 좋았어요. ···늘···."
늘 그랬어요, 하고 조용히 덧붙인다. 당신은 텅 빈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초록불이 꺼질 때까지 핸들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그런 당신이 좋아 웃는다. 라디오에서 잘 자라는 인사가 흘러나왔다.
집안에는 적막이 감돈다. 테이블 위에 미리 꺼내두었던 와인은 제 자리에 넣어두고, 케이크도 냉장고 안에 정리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따뜻한 물 안에서 노곤하게 졸며 함께 목욕을 마친 뒤엔 거실에 앉아 머리를 말린다. 창밖에는 어느덧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아무래도 밤새 쌓일 모양이었다.
"후유엔~ 들어가서 자야지. 여기서 졸지 말고."
"으음··· 네······."
내리감기는 눈을 겨우 떠내고 당신에게 몸을 기댄 채 침실로 향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흐트러진 상의를 당겨 내린다. 자연스레 벌어진 팔 안으로 안기고, 허리에 제 손을 두른 채 숨을 길게 내쉰다. 나와 같은 향 사이로 옅게 느껴지는 체향을 맡으며 이마를 부볐다. 간지러운지 당신이 낮게 웃는다.
"내일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먹고··· 오랜만에 방 정리나 할까? 나가서 데이트해도 좋은데, 눈이 쌓여서 추울 것 같지?"
"네, 눈이 쌓여서··· 나가는 건 무리겠죠···? 같이 방 정리해요, 안 그래도 서재가 조금 어지러워져서···."
"좋아. 오늘은 우선 자자. 벌써 눈이 감겼잖아."
"···네, 무리했나 봐요··· ···좋은 꿈 꾸세요."
"잘 자, 후유엔. ······사랑···"
"···사랑해요."
당신이 머뭇거리는 사이 조용히 내뱉는다. 일순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감돌고, 우리는 한참 서로를 안은 채 말이 없었다. 당신이 조금 더 힘을 주어 나를 끌어안는 순간 어쩔 수 없는 웃음이 번진다. 듣지 못했을 리가 없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에 한 번 더 내뱉었다. 사랑한다고, 늘 잠에 드는 순간마다 목 안으로만 삼켰던 말을.
곧 귓가에 당신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나를, 후토리 후유엔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밤은 길었다. 사랑을 담아 입을 맞추고, 창밖의 세상은 하염없이 하얗게 변한다. 깊어만 가는 겨울밤이 전혀 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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